모굴과 도파민
2015 수능 영어에 이런 지문이 있다. 끝 지점에 집중하지 말고 눈 앞에 놓인 눈 더미를 하나씩 헤치며 나아가라는 말이다. 긴박한 상황에서 문제를 복잡하게 해석하면 도리어 실수할 수 있다는 좋은 글이지만, 주로 재생산의 과정에서 글의 의미가 와전된다.

요즘 영포티라는 말이 유행이라 내가 영써티를 넘은 영투엔티가 될까 두려운데, 이 답답함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도파민이 나온다"는 말이 있다. 정처없이 떠도는 계획없는 무분별한 노력도 아닌 그렇다고 공부도 아닌 것을 하며 방향없는 불안감만 배설하다가, 스스로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 끝나기만 하면 그것의 결과에서 오는 반성이나 과정을 통해 얻은 성과, 교훈은 저 멀리 던져버리고 오직 "끝났다"는 안도감을 가지는 것이다. 아마 저 모굴을 지나는 스키어도 도파민에 의한 쾌락감을 느낄 것이다. 다만 저 스키어가 모든 구간을 완주할 수 있었던 것은 지나온 모굴에서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전 글에서도 말했지만 모두가 다가오는 칼날만을 바라본다. 오직 칼날이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겁을 먹고 덜덜 떨고만 있다. 문제를 두고 해결하거나 대응하는 것을 배워야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하면 잘 피하고 잘 도망칠 수 있는지만 배우고 있다.
안하고 안 혼나기
요즘 듣는 충격적인 말들 중에 하나가, "안하고 안 혼나고 싶다" 이다. 20대 친구들이 왜 이런 생각을 하는건지 난 정말 모르겠다. 물론 모든 일을 다 완벽하게 하려다가 스스로의 건강도 망가지고 너무 힘들면 그것도 그것대로 문제겠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서 그 정도로 부담이 될 일은 없다. 회사생활도 마찬가지.
그들에겐 오직 혼나지 않는 것만이, 자신의 기분이 나쁘지 않는 것만이 모든 가치판단의 중심이 되어버린 것 같다. 사회 전반에 패배주의와 니힐리즘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퍼져있다. 직업과 소득수준에 관계없이, 무언갈 "열심히" 하는 사람은 손에 꼽는다. "열심히하면 나만 손해다" 라는 생각이 전염병처럼 퍼져있고 그 독성은 사회의 혈류를 타고 퍼진 패혈증과 같이 심각하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고 이건희 회장의 말이 있다.
바뀔 사람만 바뀌어라. 기다려주겠다. 대신 남의 발목은 잡지 마라.
안하고 안 혼나도 된다. 대신 그걸 당연한 것처럼, 하나의 문화처럼 만들지 말라는 말이다. 열심히 하면 나만 손해라는 생각은 제발 스스로의 가슴속에서만 맴돌게 하란 말이다.
사조직에 있는 친형은 이런 생각에서 꽤나 자유로운 듯하다. 국내 최대 기업에선 성과가 나지 않으면 안되니까. 성과가 없는 파트와 사원은 그대로 죽은 조직처럼 도려내질수밖에 없다. 그런 생각을 모든 조직원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듯하다.
연필소년
"열심히 하면 나만 손해다" 라는 생각은 넓게 보면 "벤샤피로와 연필소년의 논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생각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떨어지는 콩고물도 없는데 왜 하냐는, 마치 배급을 기다리며 줄을 서있는 가난한 공산주의자의 생각과 다를 것이 없다.

열심히 하는 것에 도대체 무엇을 더 줘야 하나싶다. 회사가 월급을 주고 학교가 가르침을 주면 그것으로 본분을 다 한 것이 아닐까. 월급이 적다 느끼면 협상을 하면 되고, 경력을 쌓고 이직을 하면 되고, 가르침이 적다 느끼면 대학원에서 공부를 더 하면 된다. 월급이 적다 해서 "회사의 지분 절반을 주십쇼!"라고 하는 것이나, 가르침이 적다고 해서 "친절하게 개인과외를 해주쇼!" 라고 하는 것은 저 연필 소년의 생각만큼이나 조직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조직에선 모두가 바쁘다. 바쁘지 않으면 성과를 낼 수 없다. 모두가 바쁘지 않은 조직은 죽은 조직이고, 우리가 노력한다면 모두가 바쁜 조직에 속할 수 있다. 바쁜 조직에서 혼을 내는 것이 과연 주요한 일일까? 아니다. 그냥 하나의 쇼일 뿐이다. 이 조직에서 부하직원을 효율적으로 교육하기 위한 수단이 될 뿐이다.
하여튼, 상사의 꾸중이라는 모굴을 넘는 것만 생각하고, 그것을 넘는 것만이 인생의 모든 것이라 느끼고, 그것을 넘은 뒤에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눈 앞의 작은 문제에만 집중하는 모굴의 허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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